과거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의 왕 '제우스(Zeus)'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 사이에서 태어난 9명의 딸을 '무사이(Mousai)'라고 불렀습니다. 무사이는 시문학, 음악, 무용 등의 분야를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인간들이 자유로운 창조적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원천 그 자체로 여겨졌습니다.
연주를 하고 있는 아폴론과 무사이 여신들의 모습. Raphael (1483–1520), Parnassus (detail) (c 1509-11), Wikimedia Commons.
무사이는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뮤즈(Muse)'를 의미합니다. 뮤즈 여신들에 의해 영감을 받아 제작된 행위들은 '무지케(Mousike)'라고 하며, 이는 오늘날 뮤직(Music)의 어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박물관을 의미하는 뮤지엄(Museum) 또한 뮤즈의 신전을 뜻하는 단어로부터 유래가 되었습니다.
고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무사이 여신들의 신전을 줄기차게 방문했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창조적 예술가는 그의 작품 속에 영혼을 불어넣어 주는 뮤즈의 존재를 만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뮤즈를 찾기 위해 특별한 장소, 대상에 애정을 쏟으려 합니다. 허나 일상의 순간들, 지나가는 거리의 행인들에게도 마음을 쏟고 애정 깊이 바라볼 수 있다면 이들 역시 언젠간 뜻깊은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미술사의 주요한 두 거장의 작품을 만나보며 그의 작품 속 숨겨진 뮤즈를 찾아내고, 동시에 작품을 재해석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미술과 음악, 영감의 상호 작용
: 바실리 칸딘스키
좌) 바실리 칸딘스키 Vasily Kandinsky (1866-1944). Antonio Ariberti.it 우) 아놀드 쇤베르크 Arnold Schoenberg (1874-1951). Antonio Ariberti.it
"당신의 음악은 내가 그림에서 딱 찾으려던 것입니다."
미술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거장 중 한 명인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오스트리아의 천재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의 음악을 듣고 경탄을 내뱉습니다.
익히 잘 알고 계시듯이 예술사적으로 칸딘스키는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과 함께 '추상 회화'의 선구자로 유명합니다. 특히나, 칸딘스키는 당시 사실주의 회화가 주류였던 미술계에 추상이라는 센세이션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추상 회화의 이론적 정립'에 눈에 띄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뮤즈가 찾아오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작품 창작의 기반이 사실주의적 접근에 한정되어 있던 그는 1910년, 화가로서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전환점을 마주하게 됩니다.
평소와 같이 외출 후 화실에 돌아온 칸딘스키는 전에는 본 적 없던 새로운 작품을 발견합니다. 마치, 색채가 공중으로 떠오르고 아름다운 불빛이 타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니, 자기 작품이 거꾸로 놓여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칸딘스키는 '형식'을 벗어나 '색채' 그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의 감정을 어루만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새로운 경험을 마주한 칸딘스키는 이듬해, 우연히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의 피아노 공연을 관람하게 됩니다. 쇤베르크의 작곡은 '무조 음악'이라 하며, 특정한 조성이 표현되지 않아 새롭고 충격적인 음률이 이어지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이 피아노 공연을 계기로 하여, 칸딘스키는 쇤베르크와 우정을 쌓아가고 이후 칸딘스키는 음악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시각화하여 작품에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좌) Vasily Kandinsky (1866-1944), Landscape near Murnau with Locomotive (1909). Solomon R. Guggenheim Museum. 우) Vasily Kandinsky (1866-1944), Composition VII (1923). Solomon R. Guggenheim Museum.
"색채는 피아노의 건반이고, 눈은 현을 두드리며, 영혼은 여러 선율을 지닌 피아노이다"
오늘 들은 노래를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어떻게 표현할까요? 혹자들은 칸딘스키의 작품을 보고 '그려진 음악, 조성이 들리는 회화'라고도 표현합니다.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 에서 '음악으로 색채를 구성하고, 색채로써 음악을 표현하게 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칸딘스키의 변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두 작품이 있습니다.
좌측의 '기차가 있는 무르나우의 근교 풍경화(Landscape near Murnau with Locomotive)'는 칸딘스키가 여전히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보여지는 풍경을 재현하던 당시의 작품을 대표합니다. 그에 반해, 우측의 '구성 VII(Composition VII)'은 칸딘스키에게 쇤베르크가 그의 뮤즈였으며, 또 쇤베르크의 음악이 그의 창작의 원천으로 역할했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쇤베르크와 취미로 첼로를 연주하던 칸딘스키는 예술이라는 공통 분모 안에서 기존의 전통을 거부하려는 반항아적인 기질이 닮아 있었습니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음률 사이에서 조화로움을 찾는 매력이 있었고 칸딘스키를 더욱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칸딘스키는 쇤베르크와의 만남 이후로 본격적으로 추상을 연구하며 음악을 그려내는 화가로서의 대단원을 시작합니다.
영혼의 서포터
: 에드워드 호퍼
좌) Edward Hopper (1882-1967), Nighthawks(1942). edwardhopper.net 우) Vincent van Gogh (1853-1890), Cafe Terrace at NIght(1888). vincentvangogh.org
"조세핀 없이는 호퍼도 없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는 묘한 분위기의 극적 긴장과 나른한 일상의 리얼리티를 동시에 보여주는 재능있는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호퍼가 활동하던 당시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에 다소 외롭고 적막이 느껴지는 고독한 대도시의 모습이었습니다.
호퍼는 이러한 도시 속 낯선 인물과 멜랑콜리한 사회 분위기에 영감을 받은 작품을 선보입니다. 동시에 작품의 표현에 있어서는 앞선 인상주의 미술사 거장들의 전통적인 표현법을 일부 따랐기에 오묘한 작업 세계를 독창적으로 갖추게 됩니다.
호퍼의 작품은 그중에서도 빛의 화가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의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작품으로부터 다양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작품 속 배경과 등장인물 사이에 극적인 명암을 넣어, 심리적 거리감을 표현하는 것이 그 특징으로 닮았습니다.
혹자들은 호퍼의 대표 작품인 좌측의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 1942)' 이 우측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밤의 카페 테라스(Cafe Terrace at Night, 1888)'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작품의 테마와 빛의 표현이 고흐의 작품에서 착안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호퍼는 본인이 속한 사회 분위기와 인상파 경향의 특징들을 다양히 혼합하며 리얼리즘 화가로서 독보적인 행보를 걷게 됩니다.
Edward Hopper (1882-1967), Morning Sun (1952). columbusmuseum.org
그런 그에게는 또 다른 뮤즈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뉴욕 예술학교의 동기로 만나 1924년 결혼하여 호퍼와 부부가 된 조세핀 호퍼(Josephine Verstille Hopper, 1883-1968)는 당시에도 촉망받는 신예 화가였지만, 호퍼의 작품 속 주인공으로 더욱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에드워드 호퍼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 필 그래브스키(Phil Grabsky) 감독은 "조세핀 없이는 호퍼도 없다"라고 말하며 호퍼의 삶 속에서 그의 아내 조세핀에 대한 경이로운 존경심을 표합니다.
호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익명의 여인 중 대부분이 그의 아내 조세핀이며, 조세핀은 그가 예술가로 성장하도록 평생을 조력하고 지원한 서포터이자 영혼의 동반자였습니다. 호퍼에게는 작업에 대한 영감과 재료에 대한 연구를 도우면서, 대외적으로는 그의 매니저로서 역할하며 갤러리 관계자들과 소통하고 그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일을 도맡았습니다.
조세핀을 대상으로 한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위의 '아침 태양 (Morning Sun, 1952)' 에서 조세핀은 고독하고, 평화롭고, 나른해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보수적이고 내성적인 호퍼와 발랄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조세핀의 불화에 대한 내러티브를 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호퍼에게 조세핀은 어떠한 존재였는지, 조세핀은 어떠한 뮤즈로서 역할했는지 상상력을 자아내는 위 작품은 그와 그의 뮤즈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불러일으킵니다.
미국의 발명왕, 토마스 엘바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1847-1931), invent.org
이처럼 창조적 예술가들은 다른 작품, 작가, 제3의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영감을 주고받았습니다.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1847-1931)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모두가 노력할 순 있지만, 영감은 쉽게 오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창조적 영감을 위해서 각자의 뮤즈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각 개인에게로 하여금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인식하게 하는 근원과 본성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대상에서 나오기보다는, 정신적인 실체에서 고양되어 발산되는 '지혜'와도 같다”라고 답합니다.
이는 각자에게는 아름다움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며 이를 발현 시키기 위한 영감 '뮤즈'의 존재는 어느 순간이든, 어느 곳에서든 등장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에는 뮤즈가 어떻게 숨어들어 있을까요? 소개해 드리는 아래 작가들의 작품 속 영감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며 오늘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위 노연이 작가는 일본의 소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의 자전적 소설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노연이 작가는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을 마주할 때면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되새기게 된다고 합니다. 하루키의 소설 속 평이한 문장 사이에 등장하는 보편적 인물들에서 영감을 받은 노연이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어갑니다. 동시에, 자기 작품 속에도 주인공이 되는 인물을 내세워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주로 선보이는 작업을 보여줍니다.
아래 윤건호 작가는 무용수, 모델과 같은 인물을 바탕으로 영감을 받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은 매혹적이면서도 동시에 역설적으로 불완전함을 자아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포즈임에도 수려한 선과 색채의 표현을 통해 행복이라는 감정이 느껴집니다. 얼룩하게 표현된 색채들과 선의 움직임은 작가가 받아온 영감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담아 표현한 것만 같은 매력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뮤즈는 간절히 만나길 기도함으로써 마주하게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특정해서 정의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영감의 원천은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는 뮤즈라는 것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아 영원히 기억되는 나만의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을 바라볼 때면, 작가가 경험해 온 순간들과 작가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존재가 있는지도 함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작품의 배경을 더욱 넓은 맥락에서 이해해 보면서 작품을 사랑하게 되는 계기이자 나만의 뮤즈를 새롭게 만나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조광석,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서 사실성과 미국풍경회화 <밤을 새는 사람들> 중심으로」, 기초조형학연구 : 한국기초조형학회 연구논문집 v.14 no.5 , 2013년 Vasily Kandinsky, 『예술엥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권영필 옮김, 열화당, 2021년